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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타라하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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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타라하마 전투는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규슈에서 세력을 재건하기 위해 벌인 전투이다.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 붕괴 이후, 다카우지는 교토를 장악하려다 실패하고 규슈로 향했다. 규슈에서 다카우지는 쇼니 요리히사 등의 지원을 받았지만, 기쿠치 다케토시가 이끄는 조정 측 군대와 맞서 싸웠다.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다카우지의 전략과 기쿠치 측의 배신으로 아시카가 군이 승리하여 규슈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 전투는 다카우지가 세력을 회복하고 무로마치 막부 수립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규슈 단다이 설치의 선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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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타라하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남북조 시대
일부엔겐의 난
다타라하마 전장
날짜1336년 4월 13일
장소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히가시구 다타라하마, 하카타만
결과쇼군 가문의 승리
전투 참여 세력아시카가 쇼군 가문 대 황실 충성파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아시카가 쇼군 가문
교전 세력 2황실 충성파
지휘관 1아시카가 다카우지
지휘관 2기쿠치 다케토시
병력 1알려지지 않음
병력 2알려지지 않음
사상자 1알려지지 않음
사상자 2알려지지 않음
영토 변경규슈가 북조의 지배 하에 들어감
관련 전투 목록
관련 전투다타라하마
후쿠야마
미나토가와
가네가사키
구로마루
시조나와테
야와타

2. 전투의 배경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에 반기를 든 아시카가 다카우지닛타 요시사다를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격파하고 교토를 확보하려 했으나, 구스노키 마사시게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에게 패하여 바닷길로 서쪽으로 달아났다. 도중에 하리마국의 아카마쓰 노리무라(엔신) 등에게 도움을 받아 재기를 위해 규슈로 향했다.

다카우지는 히젠국의 슈고 쇼니 요리히사 등의 환영을 받았다. 한편, 히고국의 기쿠치 다케토시를 비롯하여 지쿠젠국의 아키즈키 다네미치, 아소 고레타다, 지쿠고국의 가마치 다케히사나 호시노 이에요시 등 규슈 지역 여러 호족은 조정에 가담하여 2만 기(騎) 이상으로 불어난 군세로 하카타를 쳐서 쇼니씨의 본거지인 다자이후를 함락시키고, 쇼니 사다쓰네를 자결로 몰아갔다.

아시카가 측 군세는 지쿠젠국 무나가타를 본거지로 무나가타 우지노리 등의 지원을 얻어 무나가타 대사에 전승을 기원하고, 지쿠젠국의 다타라하마에 포진해 있던 기쿠치씨 등 조정 측 군세와 전투를 벌였다. 당시 아시카가를 따르는 군세는 2천 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기쿠치 측에서 대거 배반자가 속출하여 전황이 역전되었고, 기쿠치 군세는 붕괴되어 흩어져버렸다. 아소 고레타다는 전사하였다.

규슈 지역의 여러 호족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대병력을 구성하기는 했어도 그 대부분은 조정이 유리한 정세를 보고 기쿠치 다케토시에게 가담한 자들이었다. 조정 측이 확실한 아소 고레타다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사태의 추이를 엿보며 관망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다카우지로부터 임명된 무장들도 있었다. 또한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전법을 펼치며 조정 측에 가담한 무장들의 이반을 유도한 다카우지의 전략도 주효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규슈 전역이 아시카가 측으로 돌아섰고, 다카우지는 재기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잇시키 노리우지나 니키 요시나가 등을 규슈 제압을 위해 남겨두고 다시금 교토로 향했고, 셋쓰국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기쿠치씨는 아시카가 군세를 향해 완강한 저항을 이어나갔다.

2. 1. 겐무 신정의 붕괴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규슈행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은 무사 계급의 불만을 야기했고, 이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반기를 들었다.[5] 다카우지는 닛타 요시사다를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격파하고 교토를 확보하려 했으나, 구스노키 마사시게,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에게 패배하여 규슈로 피신했다.[6]

규슈에서 다카우지는 히젠의 슈고 쇼니 요리히사 등의 환영을 받았다. 한편, 히고의 기쿠치 다케토시를 비롯한 규슈 지역 여러 호족은 고다이고 천황 측에 가담하여 쇼니씨의 본거지인 다자이후를 함락시키고 쇼니 사다쓰네를 자결로 몰아갔다.[2]

이후 다카우지는 무나가타 우지노리 등의 지원을 받아 무나가타 대사에 전승을 기원하고, 지쿠젠다타라하마에서 기쿠치 씨 등 고다이고 천황 측 군세와 전투를 벌였다. 당시 아시카가를 따르는 군세는 2천 기에 불과했지만, 기쿠치 측에서 대거 배반자가 속출하여 전황이 역전되었고, 기쿠치 군세는 붕괴되어 흩어졌다. 이 과정에서 아소 고레타다는 전사하였다.

이렇듯 다수의 배신자가 발생하게 된 배경으로는, 규슈 지역 호족들 대다수가 고다이고 천황 측이 유리한 정세를 보고 기쿠치 다케토시에게 가담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전법을 펼치며 고다이고 천황 측에 가담한 무장들의 이반을 유도한 다카우지의 전략도 주효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규슈 전역이 아시카가 측으로 돌아섰고, 다카우지는 재기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잇시키 노리우지, 니키 요시나가 등을 규슈 제압을 위해 남겨두고 다시 교토로 향했고, 셋쓰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기쿠치씨는 아시카가 군세를 향해 완강한 저항을 이어나갔다.

2. 2. 규슈 지역의 정세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에 반발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닛타 요시사다를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격파하고 교토를 점령하려 했으나, 구스노키 마사시게,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에게 패하여 규슈로 피신했다.

규슈에서는 쇼니 요리히사가 다카우지를 지지한 반면, 기쿠치 다케토시를 비롯한 다수의 호족들은 조정 측에 가담했다. 조정 측 군대는 쇼니씨의 본거지인 다자이후를 함락시키고 쇼니 사다쓰네를 자결로 몰아넣었다.[2]

아시카가 다카우지조정 측
쇼니 요리히사기쿠치 다케토시, 아키즈키 다네미치, 아소 고레타다, 가마치 다케히사, 호시노 이에요시 등


3. 전투의 경과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겐무 신정에서 이반하여 닛타 요시사다를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격파하고 교토를 점령하려 했다. 그러나 구스노키 마사시게,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에게 패하여 규슈로 후퇴했다. 다카우지는 히젠국의 슈고 쇼니 요리히사 등의 환영을 받았지만, 히고국의 기쿠치 다케토시를 비롯한 규슈 호족들은 고다이고 천황을 지지하며 2만 기 이상의 군세를 모았다. 이들은 하카타를 공격해 쇼니씨의 본거지 다자이후를 함락시키고 쇼니 사다쓰네를 자결로 몰아넣었다.[5][6]

아시카가 군은 무나가타 우지노리의 지원을 받아 무나가타 대사에서 전승을 기원하고, 지쿠젠국 다타라하마(현재의 후쿠오카시 히가시구 다타라 강 부근)에서 기쿠치 군과 전투를 벌였다. 병력은 아시카가 군이 2천 기, 기쿠치 군이 2만 기 이상으로 열세였으나, 기쿠치 군에서 대거 배신자가 발생하여 전황이 역전되었다. 기쿠치 군은 붕괴되었고 아소 고레타다는 전사했다. 이러한 배신은 규슈 호족들이 정세를 관망하며 기쿠치 다케토시에게 가담했기 때문이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적극적인 전략도 한몫을 했다.[5][6]

군사 연대기인 《바이쇼론(Baishō-ron)》은 다타라하마를 "남쪽 끝에 작은 시내가 가로지르는 약 4.83km이 넘는 건조한 해안선으로 묘사한다. 하코자키 하치만 궁의 구역은 약 약 12.95km2의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에는 하카타 시가 있고, 동쪽으로 약 8.05km~약 9.66km 떨어진 곳에는 언덕이 있으며, 서쪽에는 중국까지 뻗어 있는 탁 트인 바다가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2]

전투가 끝날 무렵, 아시카가 타다요시는 기쿠치씨 군대를 다자이후까지 쫓았고, 그들은 언덕으로 도망쳤다. 아소씨아키즈키씨 지휘관들은 자결했고, 다른 지휘관들은 항복했다.[2]

3. 1. 양측의 전력

아시카가 군은 히젠의 슈고(守護) 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 등의 지원을 받았으나, 그 수는 2천 기에 불과했다. 반면, 고다이고 천황을 지지하는 궁방 측은 히고의 기쿠치 다케토시(菊池武敏)를 비롯하여 지쿠젠의 아키즈키 다네미치(秋月種道), 히고의 아소 고레타다(阿蘇惟直), 지쿠고의 가마치 다케히사(蒲池武久)나 호시노 이에요시(星野家能) 등 규슈 지역 여러 호족들이 대거 가담하여 2만 기(騎) 이상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태평기』에서는 기쿠치 군세가 4~5만 기였고 다카우지의 군세는 500기였다고 묘사하여, 거의 백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났다고 과장하여 표현하고 있다.

3. 2. 전투의 전개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에서 이반한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겐무 정권으로부터 다카우지 추토를 명받은 닛타 요시사다를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격파하고, 닛타군을 추격해 교토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336년 구스노키 마사시게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등과 연계한 궁방측 세력에 의해 교토 주변에서 패하고 바닷길로 서쪽으로 달아났다. 도중에 하리마국의 아카마쓰 노리무라(아카마쓰 엔신) 등에게도 패하여 재흥을 위해 규슈로 향했다.[5]

다카우지는 아시카가 측에 아군으로 가담한 히젠의 슈고 쇼니 요리히사 등의 환영을 받았다. 한편으로 궁방에 아군으로 가세한 히고의 기쿠치 다케토시를 비롯하여 지쿠젠의 아키즈키 다네미치, 히고의 아소 고레타다, 지쿠고의 가마치 다케히사나 호시노 이에요시 등 규슈 지역 여러 호족이 대거 궁방으로 가세하였고, 2만 기(騎) 이상으로 불어난 이들 군세는 하카타를 쳐서 쇼니씨의 본거지인 다자이후를 습격해 함락시키고, 쇼니 사다쓰네를 자결로 몰아갔다. 사다쓰네가 아시카가 군에 조달했던 장비도 다자이후 함락과 함께 소실되었다.[6]

아시카가측 군세는 지쿠젠 무나가타을 본거지로 무나가타 우지노리 등의 지원을 얻어 무나가타 대사에 전승을 기원하고, 지쿠젠의 다타라하마에 포진해 있던 기쿠치씨 등 궁방측 군세와 전투를 벌였다. 당시 아시카가를 따르는 군세는 2천 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기쿠치 측에서 대거 배신자가 속출하여 전황이 역전되었고, 기쿠치 군세는 붕괴되어 흩어져버렸다. 아소 고레타다는 전사하였다.

이렇듯 다수의 배신자가 발생하게 된 배경으로는 규슈 지역의 여러 호족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대병력을 구성하기는 했어도 그 대부분은 궁방이 유리한 정세를 보고 기쿠치 다케토시에게 아군으로 가담한 자도 있었던 데에 있다. 궁방측이 확실한 아소 고레타다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사태의 추이를 엿보며 관망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다카우지로부터 임명된 무장들도 있었다. 또한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되어서도 오히려 더욱 적극적인 전법을 펼치며 궁방측에 가담한 무장들의 이반을 유도한 다카우지의 전략도 주효하였다.

전투가 끝날 무렵, 아시카가 타다요시는 기쿠치씨 군대를 다자이후까지 쫓았고, 그들은 언덕으로 도망쳤다. 아소씨아키즈키씨 지휘관들은 자결했고, 다른 지휘관들은 단순히 항복했다.[2]

다카우지는 그의 지휘관들의 용맹함과 헌신에 대한 보상을 했지만, 그의 적들과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여러 씨족들에게 사면을 제안했고, 그들은 결과적으로 그와 합류했다. 이로써 규슈는 쇼군정부와 북조에 의해 통일되었다.[2][3]

3. 3. 전투의 결과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아시카가 군은 기쿠치 다케토시가 이끄는 고다이고 천황 측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아시카가 측은 초반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쿠치 측에서 대거 배신자가 발생하면서 전황이 역전되어 승리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아소 고레나오는 전사하였고, 기쿠치 군은 궤멸되었다.[5][6]

이러한 배신자 발생의 배경에는 규슈 지역 호족들이 정세를 관망하며 기쿠치 다케토시에게 가담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궁방(고다이고 천황) 측이었던 아소 고레타다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사태를 지켜보거나 심지어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임명된 무장들이었다. 또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전법으로 상대방의 이반을 유도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전략도 주효했다.[5][6]

이 전투의 결과로 규슈 지역 대부분이 아시카가 측에 넘어가게 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잇시키 노리우지, 니키 요시나가 등을 규슈에 남겨두고 교토로 향했으며, 이후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기쿠치씨는 이후에도 아시카가 군세에 완강히 저항하였다.[5][6]

4. 전투의 영향

다타라하마 전투 결과 규슈 거의 전역이 아시카가 편에 붙어 다카우지는 체제를 재정비하게 되었다. 다카우지는 잇시키 노리우지 등을 규슈에 남겨 억제하고, 다시 상경하여 셋쓰국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쿠스노키 마사시게를 격파한다.[6]

그러나 이 전투 후에도 기쿠치씨는 완강하게 저항을 계속했다.

4. 1.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세력 회복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겐무 신정(建武新政)에서 이반한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를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격파하고 교토를 확보하려 했으나, 1336년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등에게 패하고 바닷길로 서쪽으로 달아났다. 하리마국(播磨国)의 아카마쓰 노리무라(赤松則村)에게도 패한 다카우지는 재기를 위해 규슈(九州)로 향했다.[5]

다카우지는 히젠(肥前)의 슈고(守護) 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 등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히고(肥後)의 기쿠치 다케토시(菊池武敏)를 비롯한 규슈 지역 호족들은 대부분 고다이고 천황 측에 가담하여 2만 기(騎) 이상의 군세를 이루었고, 하카타(博多)를 쳐서 쇼니씨(少弐氏)의 본거지인 다자이후(大宰府)를 함락시키고 쇼니 사다쓰네(少弐貞経)를 자결로 몰아갔다.[6]

아시카가 측 군세는 무나가타(宗像)의 무나가타 우지노리(宗像氏範) 등의 지원을 얻어 무나가타 대사(宗像大社)에 전승을 기원하고, 지쿠젠(筑前)의 다타라하마(多々良浜)에 포진해 있던 기쿠치씨(菊池氏) 등 고다이고 천황 측 군세와 전투를 벌였다. 당시 아시카가를 따르는 군세는 2천 기에 지나지 않았으나, 기쿠치 측에서 대거 배반자가 속출하여 전황이 역전되었고, 아소 고레타다(阿蘇惟直)는 전사하였다.

이렇듯 다수의 배신자가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규슈 지역 호족들이 정세를 관망하며 다카우지에게 임명된 무장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전법을 펼치며 고다이고 천황 측에 가담한 무장들의 이반을 유도한 다카우지의 전략도 주효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규슈 전역이 아시카가 측으로 돌아섰고, 다카우지는 재기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 등을 규슈 제압을 위해 남겨두고 다시 교토로 향했고, 셋쓰국(摂津国) 미나토가와 전투(湊川の戦い)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를 격파하였다.

4. 2. 규슈 단다이 설치의 선례

잇시키 노리우지가 규슈에 남아 규슈 지역 진압을 맡게 된 것은 이후 무로마치 막부 체제에서 규슈 단다이 설치의 선례가 되었고, 노리우지는 초대 규슈 단다이로 간주된다.[7]

5. 전투 이후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승리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규슈 지역의 지배력을 확보하고 체제를 정비하였다. 잇시키 노리우지와 니키 요시나가 등을 규슈에 남겨 억제력을 유지시킨 후, 다시 상경하여 셋쓰국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쿠스노키 마사시게를 격파하였다.

5. 1. 기쿠치 가문의 저항

아시카가 군히젠국 슈고인 쇼니 요리히사 등의 영접을 받았다. 한편, 궁방에 가담한 세력은 히고국의 기쿠치 다케토시를 비롯하여 지쿠젠국의 아키즈키 타네미치, 히고국의 아소 고레나오, 지쿠고국의 가마치 타케히사, 호시노 이에요시 등 규슈 여러 호족들이었고, 그 군세는 2만 기 이상이었다. 궁방 군세는 하카타를 공격하고 쇼니씨의 본거지 다자이후를 함락시켜 쇼니 사다츠네를 자결하게 했다.

아시카가 세력은 무나카타 우지노리 등의 지원을 받아 무나카타 대사에 전승을 기원하고, 지쿠젠국 다타라하마 (후쿠오카시히가시구 다타라 강 부근)에 포진한 기쿠치씨가 이끄는 궁방과 싸웠다. 그러나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기쿠치군이 우세했지만, 기쿠치군에서 대량의 배신이 발생하여 전황이 역전되었고, 결국 기쿠치군은 패주했으며 아소 고레나오는 전사했다.

규슈 호족들은 대부분 어쩔 수 없이 기쿠치 다케토시에게 가담한 자들이었다. 확실하게 궁방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소 고레나오 정도였고, 나머지는 기회주의적이거나 오히려 다카우지 편에 가까운 무장들이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전법을 취하고 배신을 유도한 다카우지의 전략도 주요한 원인이었다.

다타라하마 전투 이후에도 기쿠치씨는 계속해서 완강하게 저항했다.

6. 유적

다타라하마 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현재 후쿠오카시 유통센터 부지에 해당한다. 부지 한 켠의 현도 후쿠오카 노가타선 유통센터 서구 교차점(니시테쓰 버스 하마다 정류장·JR 규슈 버스 노카타선 지쿠젠 하마다 정류장 부근)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곳에서 남동쪽으로 가면 전사자를 제사하는 가부토즈카(투구 무덤) 터가 있고, 「가부토즈카 유래기」라는 비석이 있다.[1]

7.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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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The Samurai, A Military History MacMillan Publishing Co., Inc.
[2]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4] 서적 日本の歴史11 太平記の時代 講談社
[5] 문서 후쿠오카현 무나가타 시 주변
[6] 문서 일본 후쿠오카시 히가시구 다타라 강 부근
[7] 서적 日本の歴史11 太平記の時代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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